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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세 폐지의 전제조건 박상근 경영학박사 06.05.23
미국 부시행정부가 세 부담 경감과 경기회복을 위해 상속세 폐지를 추진 중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도 재벌기업 후세가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상속세가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상속세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부시경제팀은 상속세가 이중과세이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부모가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관련 세금을 모두 냈는데, 이 재산이 자식에게 넘어간다고 또 세금을 물리면 이중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탈세 등으로 가진 자의 재산형성과정이 불투명하고, 부(富)가 일부 계층에 집중된 국가에서는 평생 동안 탈세한 세금을 정산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상속세를 폐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미 행정부가 상속세를 폐지하려는 행보와는 달리 정작 빌 게이츠 시니어,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등 미국 최고 부자들은 부시의 상속세 폐지안을 반대한다. 이들이 회원으로 있는 ‘책임감 있는 부자들(Responsible wealth)’모임이 상속세폐지 반대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상속세가 있기 때문에 미국 부자들이 평소에 기업 경영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득세를 비롯한 세금을 제대로 내고 문화예술단체에 기부를 하는 등 윤리와 책임을 다고 있는데 상속세를 없애면 부자가 이러한 윤리와 책임을 다하기 어렵다는 게 이들 주장이다. 대부분 국가에서 총 조세수입 중에서 상속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1~2%에 불과하지만 오랜 전통을 갖고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재벌이 세금 없이 부(富)를 자식에게 넘겨주기 위해 비상장주식,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전환사채(CB) 등을 이용한 편법을 동원해 왔다. 최근 현대자동차 사건에서는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비자금조성과 배임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기업경영이 불투명하고 가진 자에 대한 국민의 시각이 미국과 다른 점도 상속세 완화에 걸림돌이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소유와 경영을 연관 지으려는 데도 문제가 있다. 전경련에 따르면 우리나라 출자총액제한 기업집단의 총수 일가 지분율은 4.64%에 불과하다. 총수일가가 상속시점에서 주식을 팔아 세금을 낸다고 하면, 2세 지분은 반으로 줄어든다. 이로 인해 안정적인 경영권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상속세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경영권은 주주가 가지고 있는 고유권한이다. 총수일가가 좌지우지할 일이 아니다. 기업경영을 잘 해서 주주이익을 극대화 하고 기업을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경영자라면, 소유경영인이든 전문경영이든 주주의 선택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례로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인 일본의‘도요타자동차’는 ‘도요타’가문이 1930년대에 설립한 회사다. 이 회사는 현재 창업 3세대가 명예회장, 4세대가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도요타’ 일가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채 4%가 안 된다. 미국의 ‘포드자동차’는 오너지분이 3.7%에 불과하지만 주주들이 창업정신을 잇고 오너경영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는 현실론을 받아들여 ‘포드’일가가 가지고 있는 주식에 차등의결권을 부여해 40%의 경영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 2위 부자인 워런 버핏은 최근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겠지만, 회사경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것”이라고 발표했다.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모두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우리나라 일부 재벌 총수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현재 상속세 완화 문제는 일부 재벌그룹의 3세대로의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불거졌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의 경영권이 창업자에서 현재 총수들인 2세대로 넘어올 때는 별 다른 진통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규모와 재벌규모는 재벌 2세대가 경영권을 승계할 당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졌다. 그동안 회계의 투명성이 강화됐고 시민단체를 비롯한 국민의 감시도 달라졌다. 또 2004년부터는 상속․증여세 부과에 있어 완전포괄주의가 도입됐다.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들은 이러한 경영권 승계관련 환경변화를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일부 재벌그룹이‘낼 세금을 다 내고 경영권을 승계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동안의 경영권 승계관련 환경변화를 반영한 것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이 발표가 가진 자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고 경영권을 승계 하는 관행이 자리 잡는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렇다면 우리정부가 기업의 경영권승계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상속세 폐지를 추진하고 일반국민도 이에 호응하는 시대가 언제쯤 올까. 먼저 상속세를 완화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재벌을 포함한 가진 자의 몫이다. 구체적으로 기업인은 법을 지키고 재산형성 과정이 투명하도록 기업경영 과정에서 세금을 제대로 납부해야 한다. 또 가진 자들이 일자리 창출, 기부 등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는 시대가 돼야 한다. 결국 미국의 상속세 폐지 논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가진 자들이 법을 지키면서 사회적 책임(noblesse oblige)을 다할 때 상속세 완화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06. 5. 23. 조세일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