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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세와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 박상근경영학박사 04.07.07
근래 교보생명 창립자인 고(故) 신용호 회장의 유가족들이 국내 상속세로는 사상 최대 액수인 1338억원을 자진 신고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연히 내야할 세금을 낸 것인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들이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결코 간단히 볼 일이 아니다.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이미 알려진 대로 대신문화재단 등을 설립해 생전에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을 착실하게 실천해 왔다. 또 신 창립자는 재산을 재단에 귀속시키는 등 생전에 상속세를 피할 수 있는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재산에 대해서도 철저한 세금납부의 길을 택한 점이 돋보인다.

상속세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재산이 적어도 10억원이상은 돼야 과세되는 부자 세금이다. 서민들과는 인연이 없는 세금인 것이다. 상속세 세수(稅收)를 보더라도 상속세는 부자들이 내는 세금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상속세는 국세의 0.5%(2002년: 3978억원)에 불과하다. 생전에 재산을 물려주는 데 과세하는 증여세까지 포함하더라도 국세의 0.9%(2002년: 8561억원)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상속세를 낼 만큼 자손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부자는 145명 중 1명꼴이다

이와 같이 상속세는 조세의 주목적인 세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보잘 것 없는 세금이고 그 납부자가 소수이다. 그럼에도 상속세가 오랜 역사를 가진 세금으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상속세는 부(富)의 재분배 등 조세정책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세금이고,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노블리스 오블리제)과 연계돼 있는 상징적 세금으로서 그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은 부(富)를 쌓는 과정에서 사회와 국가에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러므로 기업은 사회와 국가에 이익의 일부를 환원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이 의무는 구체적으로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세금으로 규율(規律)된다. 상속세는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세금이고,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의 성실납세 평가의 기준이 되는 세금이기도 하다.
상속세는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촉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미국의 구체적인 예를 보자. 미 부시대통령은 지난 2001년 상속세가 경기활성화에 걸림돌이 되고 이중과세의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들어 2009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감세정책을 발표하고 이를 추진 중에 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의 부자들은 상속세 폐지를 반대하고 있다. 미국의 부자들이 상속세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속세를 폐지할 경우 부자들이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자선단체에 내는 기부금이 크게 줄어 미국의 전통인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저해(沮害)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의 기부를 기다리는 빈곤층이 많다. 현재 4인 가족기준으로 월 생계비가 1백55천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초생활보장대상자가 137만명이고, 기초생활보장대상자 생활수준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차상위계층이 320만명으로서 빈곤층이 450여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소년.소녀가장, 양로원.장애인 시설에 수용돼 있는 노인과 장애인, 부모가 이혼한 결손가정의 청소년, 독거노인 등 가진 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최저 생계조차도 꾸려갈 수 없는 경제 능력을 상실한 소외계층이다.

경제 능력을 상실한 소외계층을 구제할 일차적 책임은 물론 국가에 있다. 하지만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예산은 선진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수준에 있다. 재원은 부족하고 쓸 곳은 많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는 이 예산 공백을 기부로 채워 줄 책임이 있다.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가 경제 능력을 상실한 소외계층을 외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정책 방향을 성장에 둘 것인가, 분배에 둘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분배를 강조하는 것은 성장을 가로막는 다는 것이 가진 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가 경제 능력을 상실한 소외계층을 돕는 일은 성장과 분배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할 것인가에 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인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는 문제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가진 자가 이행해야 할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필수적인 문제인 것이다.

기업인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후손에게 남긴 재산에는 법 소정의 상속세가 과세된다. 기업인이 생전에 부(富)를 쌓는 과정에서 기업이익의 많은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고 소득세 등 관련 세금을 제대로 냈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상속재산과 상속세액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간에 경제규모를 감안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재벌들의 상속재산이 일본 재벌들의 상속재산 보다 적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일본 기업인들에 비해 생전에 사회적 책임을 더 잘 이행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 기업인이 일본 기업인보다 생전에 기업이윤을 더 많이 사회에 환원하고 세금을 제대로 냈다는 결론인데 과연 우리 국민이 이를 납득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일부 대기업이 2세에게 비상장주식의 헐값 매각,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저가발행, 전환사채(CB)의 부당 발행 등 세금없이 부(富)를 대물림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온 점에 비춰볼 때, 우리나라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가 생전에 기부와 성실 납세로 상속재산이 줄었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제 우리나라 재벌과 가진 자들도 교보생명 창립자의 후손(後孫)들의 상속세 성실 납부를 계기로 상속세를 제대로 내는 것도 가진 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임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국민의 반(反) 기업정서가 가장 강한 나라다. 노조는 기업이 ‘사회공헌기금’을 강제로 내야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반 기업 정서는 기업 경영에 있어 많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업이 반(反) 기업 정서를 국민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투자에 손을 놓고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국민의 반(反) 기업 정서는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에 인색하면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부(富)를 대물림한 일부 기업과 기업인의 책임이 크다고 봐야 한다. 이제 기업 스스로가 나눔경영과 윤리경영을 실천함으로써 반(反) 기업 정서 해소와 설비투자에 적극 나설 때다. / 2004. 5. 8. 조세일보, 칼럼.